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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조는 김홍도의 영원한 ‘후원자’였다

2018년 11월 12일(월)
오홍지 기자 ohhj@okc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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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우 중원대학교 교수
연풍현감 단원 김홍도 이야기 두 번째

이근우 교수.jpg
▲ 이근우 교수.
김홍도가 성인이 된 후 최초로 확인되는 화원으로서의 행적은 1765년(영조41) 21세 때의 것으로, 지금은 작품이 전하지 않는 '경현당수작도'의 제작이다.

'경현당수작도'는 원래 병풍이었으나 그림부분은 망실되고 두 폭의 글씨 부분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남아 전한다.

1764년에 국왕 영조의 즉위 40년을 맞음과 동시에 주상(主上)의 춘추 71세가 되어 여든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의 경사가 겹쳤으므로, 특히 세손(世孫)이 다섯 차례나 간곡하게 청하여 이루어진 행사인 만큼 중요한 행사였다.

이러한 중요한 행사의 의궤병풍을 약관 21세의 젊은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은 그가 일찍이 화명이 대단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인 동시에 그림의 기예로써 세손을 모신 첫 번째 인연의 예로서 매우 주목되는 점이라 하겠다.

이렇게 세손, 훗날 정조가 간곡히 부탁한 행사에 서호(西湖) 김홍도가 함께함으로서 정조와 김홍도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 후 서호는 1773년 29세 때 정월 7일부터 22일까지 영조 어진 및 정조 왕세손 때의 초상화 그림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감조관(監造官)은 김두열이고, 주관화사는 변상벽,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隨從畵師)는 신한평, 김후신, 진응복 등이 있었다. 김홍도는 이 일로 사포서(司圃署)의 별제(別提) 벼슬을 제수 받았다.

정조의 체계적인 화원제도의 정립 변화 속에서 단원 김홍도는 애민선정, 수령으로서의 덕망, 군신과의 관계 등의 윤리의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안기찰방과 연풍현감 재직 시의 관료행적에서 확인된다. 즉,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할 애국충정(愛國衷情), 우국제민(憂國濟民), 공명정대(公明正大), 충효열, 의(義)로움의 덕목(德目)등의 숭고한 정신과 탁월한 식견(識見) 등은 정조와의 인연과 어진제작을 통하여 목민관이 지녀할 기본 윤리정신은 김홍도 예술정신의 한 축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김홍도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정조와 김홍도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지필묵(紙筆墨)과 함께 현장을 오가며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한 주인공이었다.

글과 그림이라는 것이 종이 위에서만 되는 것이 아니듯, 현장의 소리를 듣고자 했던 정조와 그 소리를 그림으로 보여 주려 했던 김홍도는 둘이 아닌 예원군주와 화원이라는 하나의 모습이었다고 하겠다.

※ 본 논고에서 김홍도 호를 서호로 하였다. 서호는 김홍도의 처음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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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어진. /출처=전주어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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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서는 궁중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관아. 사포서터 표지석, 준수방(俊秀坊 : 종로구 통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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